김 광 명(숭실대 명예교수, 미학/예술철학)
1.
작가 강구원을 가까이 아는 지인들은 화가로서 그가 지닌 지적인 면모와 인성에 감동을 받는다. 특히 조용하고 부드러운 심성과 언행의 진중함을 지적하기도 한다. 필자의 생각엔 이런 작가의 품성과 태도가 작품으로 연결되어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화산 강구원의 작품세계 개인전 34회, 아트페어 7회, 그룹전 국내외 300여회 출품하였으며, 1990년부터 ‘우연의 지배’라는 주제를 중심으로 이와 연관된 다양한 소주제를 다루며 작업에 임하고 있다. 한국미술협회 광진·포천지회, 현대미술 작가회, 선과 색, 한국 전업미술가협회, Gnaru, 예형회, 수목원 가는 길 문화마당 대표를 역임하고 있다.
를 좀 더 가까이 천착해보고 싶은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 왔으나 이런 저런 일로 틈을 내지 못하고 늘 과제로 미루어 온 터였다. 근자에 「예술에서의 ‘우연’의 문제와 의미」 김광명, 「예술에서의 ‘우연’의 문제와 의미」, 『미술과 비평』, 2021년 71호, 58-76쪽.
에 관한 글을 쓰면서 나름대로 때가 성숙하여 이제 비로소 필자의 글로 작가 강구원의 작품을 접하게 되니 필자로선 감회가 새롭다. 글과 작품이 서로 환류(還流, 피드백)되어 더 나은 차원의 작품세계로 고양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진정한 자기 인식과 자기이해는 철학적 탐구의 목표이며, 동시에 예술의 목표이기도 하다. 이는 삶의 의미와 가치를 담보해주는 까닭이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는 존재’이다. 작가 강구원은 평소에 “그림그리기는 의미를 만드는 일이고, 감상하는 것은 그 의미를 읽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와 평자 혹은 감상자는 작품을 매개로 의미를 서로 공유하며 소통을 꾀한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엔, 작품에 담긴 의미를 새겨보는 일은 작가의 성(姓)과 호(號)를 합해 부르는 ‘강화산’에서 아주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작가의 호는 본명이외에 허물없이 쓰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세상에 널리 드러난 이름이다. 한자로는 좀 어의가 다르긴 하지만, 작가 스스로도 이를 강과 산의 조화, 즉 ‘강화산’이라 일컫기 때문이다. 강과 산은 자연의 대명사로서 부분적으로 보면, 그 흐름과 형세가 제각각이고 마치 우연의 산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질서와 조화를 이루어 멋진 풍광을 자아내고 생명을 유지해가는 필연적인 산물이 된다. 무엇보다도 작가 강구원은 자연과 생명의 이면에서 우연의 현상이 지배적임을 터득했음이다. 자연과 생명에 우연이 어떻게 나타나며 개입하고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는 일이 작가의 작품세계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2.
생명은 미시세계에서 우연히 발생하면서 출현한다. 그러나 일단 발생한 생명현상의 진행은 변이(變異)를 거듭하면서 필연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변이(變異)란 ‘예상하지 못한 사태나 괴이한 변고’로서 생물학적으로는 ‘같은 종 또는 하나의 번식 집단 내에서 개체 간에 혹은 종(種)의 무리들 사이에서 나타나는 형질의 차이’이며, 그 요인에 따라 유전변이나 환경변이 등으로 나뉜다. 그러니까 유전에 의하든 환경에 의하든 예상하지 못한 사태로서의 우연적 변이는 일어나기 마련인 것이다. 우연성이 지닌, 우연성 안에 내장된 필연적 관점은 아름다움이 주는 즐거움의 합목적성과도 연관된다. 다시 말하자면 우연적 필연이란 합목적성의 산물인 것이다. 우리는 흔히 일상에서 ‘의도하지 않은 우연한 발견, 혹은 운 좋게 발견한 데서 얻은 뜻밖의 재미나 기쁨’이 작품으로 형상화된 경우를 보며 즐긴다. 다양한 삶의 형식을 담아 표현하는 예술의 경우에 작동하는 심미적 마음의 회로(回路)는 복잡성과 우연성으로 가득 찬 환경 속에서 각 개체로 하여금 환경에 합당한 창조를 수행하며, 생태학적 조화를 도모하는 삶의 원리로 작동한다. 그것은 자연의 조화로운 질서를 예술 안에 담는 일이며, 합목적적인 미적 즐거움을 향수하는 것이다.
우연이란 본디 예측이 어려우며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것이다. 운이나 우연은 무작위로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연을 헤아리는 일은 전적으로 인간의 상상력에 의존한다. 인간의 상상력이야말로 인간이 지닌 가장 위대한 자산이다. 역설적으로 우연의 존재로 인해 우리의 삶은 역동적이고 긴장감을 자아내며 때로는 풍요롭게 된다. 현대과학이 표방하는 우주의 모습은 뉴턴(Isaac Newton, 1643∽1727)이나 라플라스(Pierre-Simon, marquis de Laplace, 1749∽1827)가 주장하듯, 기계적인 필연성으로 관철된 것이 아니라 필연과 우연의 본질에서 얽히고설킨 역동적인 세계이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예측불가능하며, 새로운 것이 생기고 또한 소멸하는 세계이다. 우연은 필연에 대항하는 방해물이 아니라 필연과 더불어 세계를 만들어내는 본질적인 요소이다. 우연은 인간에게 미지의 미래세계를 열어 준다. 그것은 ‘암흑의 미래’가 아니라 ‘매혹으로 가득 찬 경이로운 미래’이다. 우연의 다양한 형태를 어떻게 이해하고, 그것과 어떻게 맞설 것인지가 우리에게 주어진 큰 과제이다. 다케우치 케이, 『우연의 과학-자연과 인간 역사에서의 확률론』, 서영덕·조민영 역, 윤출판, 2014, 230-231쪽.
이 과제가 해명될 때에 세계는 더욱 확실해지고 분명하게 다가올 것이다. 뒤이어 살펴보겠지만, 이 점은 작가 강구원의 작품세계에 잘 드러나 있다.
과학이나 종교 혹은 인간의 양심 등에 있어서 절대적 진리나 보편적 진리가 제한적으로 가능하지만, 진리는 문화적 상대주의나 역사적 상황에 따른 변수에 의존한다. 변수는 상수(常數)와는 달리 어떤 관계나 범위 안에서 가변적 요인에 따라 달라진다. 피터 R. 칼브, 『1980년 이후 현대미술-동시대 미술의 지도 그리기』, 배혜정 역, 미진사, 2020, 17쪽.
진리란 절대적이라거나 상대적이라는 양자택일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문화적, 역사적 상황의 변화에 따른 가변적 산물이며 상대적 절대성과 절대적 상대성을 아울러 지닌다. 예를 들어, 예술에서 개념이나 관념을 주요근거로 삼는 “개념미술가들은 합리주의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신비주의자이다. 그들은 논리가 도달할 수 없는 결론으로 도약한다.” Sol Lewitt, “Sentences on Conceptual Art”(1969), Ellen Johnson(ed.), American Artists on Art, New York: Harper and Row, 1982, 125쪽.
논리적 접근이 어려운 곳은 많은 의미를 함축한 신비주의의 영역이다. 이를 필연과 우연으로 대비해보면, 우연의 영역인 것이다. 개념으로서는 합리적 결론에 다다를 수 없으며 ‘논리가 도달할 수 없는 결론’이란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비합리적인’ 선택을 한다는 뜻이다. 우연은 비합리성을 일컫는 또 다른 이름이다.
미적 대상과 그 시각적 표현의 변천과 전개과정인 미술사에서도 다음의 언급은 눈여겨 볼 대목이다. 즉, 오스트리아의 소설가·저널리스트·극작가·전기 작가인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는 동로마제국이 멸망한 1453년부터 1차세계전이 끝난 1917년까지의 역사에서 우연의 순간이 역사적 흐름을 바꾼 사례를 들고 있다. 그는 심지어 “우연이야말로 수많은 위대한 업적의 아버지다.” 슈테판 츠바이크, 『광기와 우연의 역사-인류역사를 바꾼 운명의 순간들 1453-1917』,
안인희 역, 휴머니스트 출판그룹, 2004(1판 1쇄), 2020(2판2쇄), 221쪽.
라고 말한다. 예술이 시대의 반영이라면, 당연히 예술은 시대에 반영된 우연적 요소까지 포착하여 표현하기 마련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이러한 말이 아니더라도 의도하지 않은 우연의 개입으로 인해 역사의 큰 흐름이 바뀐 많은 예들은 물론이려니와 개인사에 있어서도 그러한 사례가 흔히 있음을 우리는 기억한다. 때로는 치밀하고 정밀한 계산이 그보다도 강하게 우연성과 짝을 이루어 역사의 흐름에 관여하기도 한다. 이런 경우 우연성마저도 치밀한 계산에 포섭되어 뜻하지 않게도 더 높은 차원으로 역사에 기여한 것처럼 보인다. 이를테면, 우연적 필연으로 작용한 셈이다. 예기치 않은, 불확실성의 시대에 우리는 예술을 통해 우연을 길들이는 의미를 되돌아봐야 할 것이며, 이로 인한 예술적 풍요로움을 통해 삶의 다양성과 풍요로움을 더욱 더 향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3.
강구원 작품이 지향하는 주제를 압축한 것은 2017년에 화산그림창고 출판사에서 내놓은 책자인 『침잠과 울림의 미학』에서 두드러진다. ‘침잠과 울림’은 씨실과 날실이 되어 작가의 미학적 성찰을 위해 서로 직조된다. 강구원은 생명에 대한 경외와 자연에 대한 사랑을 기조로 하여 ‘우연의 지배’라는 주제로 작업을 해오고 있다. 소재로는 캔버스위에 아크릴, 노끈, 철선, 실, 리벳, 연필, 대추나무, 성경책, 헌 책 등을 다양하게 사용하여 우연을 엮어낸다. 35여년에 걸친 주요 작품을 보면 다음과 같다. 1989년 첫 개인전 주제인 ‘레퀴엠’은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고 안식을 기원하는 것으로 그 무렵 시대적 분위기를 적절하게 표현한,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레퀴엠> (1987-1989)연작을 시작으로 90년대 들어서 ‘우연의 지배’라는 작품의 경향을 띠며 차츰 추상성이 강한 모습으로 변화되었다. <우연의 지배-나의 모습> (1996), <우연의 지배-생명> (1998), <우연의 지배-사원의 뜰에서> (2002), <우연의 지배-섬, 사라지는 것들에 대하여> (2004), <우연의 지배-분단의 현실> (2004), <우연의 지배-고요와 울림> (2007-2011) 연작, <우연의 지배-마음으로 세우는 탑> (2005-2015) 연작, <포도밭에서> (2013), <우연의 지배-레퀴엠> (2014) 연작, <우연의 지배-생물을 위하여> (2014), <우연의 지배-생물과 무생물을 위하여> (2014), <우연의 지배-생물과의 소통> (2014), <우연의 지배-선물> (2016-2017) 연작, <세익스피어 소네트-선물> (2017) 연작, <우연의 지배-포도밭에서> (2021) 연작, <우연의 지배-소네트) (2020-2021) 연작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연의 지배’에 따른 소주제들은 서로 연결되어 우연을 필연적 질서로 편입시킨다.
우연의 문제를 주제로 내걸고 작업을 하고 있는 작가 강구원은 개인전 “우연의 지배-소네트” 전(2020.08.05.-11, G&J 광주전남갤러리)을 열어 주목을 끈 바 있다. 그리고 “천상의 소리, 존재의 공명” 전(2021.12.22.-28, 포천문화재단 갤러리)에서 우연의 문제를 존재의 근원과 연관 지어 그 깊이를 더하고 있다. 생각에 침잠하여 모색하고 선적(禪的)인 경지에 가깝게 붓 가는대로 자연스런 움직임을 보인다. 작가 강구원의 그림은 시처럼 간결하면서도 짙은 여운이 담겨 있다. ‘우연의 지배’란 우리가 주체적으로 우연을 지배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우리가 객체가 되어 우연에 의해 지배를 당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이렇듯 우리 인간이 맺는 우연과의 관계는 주체와 객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보인다. ‘우연’안에서 주객은 하나가 된다.
“우연의 지배-소네트”에서 작가 강구원이 제시한 우연의 지배와 연관된 소네트는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의 소네트 윌리엄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 소네트』, 김용성 역, 북랩, 2017 참고. 소네트는 14행시로 이루어진 총 154편이다. 집필 시기는 1592년에서 1598년 사이로 추정된다.
에서 차용한 것이다. 시인인 화자, 시인의 고귀하고 수려한 젊은 남자 귀족, 눈과 머리카락이 검은 여인을 둘러싼 사랑과 갈등을 그린 이야기다. 소네트에서 시간은 아름다움을 뺏어가는 원망의 나쁜 이미지로 그려진다. 작가 강구원은 붓으로 그리는 표현 방법에 머무르지 않고 이를 확장하여 나무나 철선 등의 오브제를 사용하며 다양한 표현기법을 활용한다. 여러 색채를 가능한 한 배제하고 단색 위주로 하되 자연에 대한 관조와 더불어 숨어 있는 질서를 느낄 수 있다. 예술은 무질서와 혼란스러움 뒤에 숨어있는 질서를 찾아 모색하는 과정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생명은 지극히 우연성에서 탄생하지만 그 근저에는 필연이라는 운명론과 겹쳐 있다. ‘지배’라 함은 절대자 안에서의 자유로운 다스림이며, 작가의 예술의지의 연장선 위에 펼쳐진다. 이렇듯 “우연의 지배 –소네트”는 우연적인 삶을 다스리는 필연에 의한 사랑의 예찬이다. 셰익스피어 소네트가 인간의 다양한 정서를 절제된 시행(詩行)에 녹여낸 것처럼, 작가 강구원은 이를 자신의 작품으로 체현하고 있다. 생명과 삶, 사랑과 자유와 같은 상징을 자연의 오묘한 질서와 조화에 맡기며 우연과의 관계설정을 모색한 것으로 보인다.
미술비평가 민동주는 강구원의 ‘우연의 지배’에서 ‘원시적 표현주의’를 읽는다. 말하자면 인간의지의 너머에 있는 원초성을 본 것이다. 이 원초성은 근원과 맞닿아 있다. 이는 자연질서의 일부이며 절대자의 섭리요, 진리 가운데 있다. 또한 사학자이자 비평가인 이석우는 강구원의 그림에서 “진실에 도달하려는 진지한 모색”을 지적한다. 그의 작품세계는 초기엔 구상적 접근과 더불어 사회적 인식을 작품에 담으면서 차츰 ‘우연의 지배’라는 주제에 몰입하고 추상으로 변화되었다. 여기에서 추상이란 가장 구체적인 것의 정수(精髓)를 추출하여 낸 것으로 의미의 압축이요, 상징인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강구원은 어떤 형식이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사물의 본질에 다가가는 자세를 보이며 명상하고, 선적(禪的)인 붓 터치를 한다. 이리하여 그의 그림은 간결하면서도 함축미를 지니게 된다.
4.
시의 여백과 삶의 리듬을 우연과 연관하여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시 예술에서의 시란 “미적 우연 혹은 우유성(aesthetic accident)에 의하여 진리를 내포하고 있을 수는 있으나, 이것이 시적 본성을 이루는 부분은 아니다.” Sidney Zink, “Poetic Truth”, The Philosophical Review, 54, 1945, 133쪽.
미적 우연에 참된 이치, 곧 진리가 내포되어 있다 하더라도 이것이 곧장 시적 본성의 부분을 이루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우연한 일에 어떻게 진리가 내포될 수 있는가. 이는 곧 우연과 진리 간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진리의 문제는 필연과 우연으로 양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섞여 있을 수 있다. 대체로 우연이 필연 안에 포섭되어 진리의 차원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이는 곧 시적 우연이 시적 진실 혹은 시적 진리의 영역 안에 위치하는 것이다. 미적 우연이 시의 본성을 이루는 부분은 아니지만 어떻든 진리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미국의 화가이자 조각가이며 판화가인 엘스워스 켈리(Ellsworth Kelly, 1923∽2015)는 선과 색, 형태를 강조하면서 예측할 수 없는 기법들을 표현한 인물이다. 그는 “구성하고 싶지 않다. 빨간색과 파란 색이 어떻게 조화를 이루고, 저곳에 노란색이 있어야 한다는 걸 알아내고 싶지 않다. …우연히 작업이 이루어지게 놔두고 관객과 회화 사이에 어떤 개성이 개입하지 않도록 방향을 제시하는 거다. 작품 자체로 존재하도록 놔두는 거다.” Martin Gayford, The Pursuit of Art: Travels, Encounters and Relations, London: Thames & Hudson Ltd., 2019. 마틴 게이퍼드, 『예술과 풍경』, 김유진 역, 을유문화사, 2021, 262쪽.
라고 말한다. 의도적인 구성보다는 작품자체가 우연에 기대어 스스로 되어가도록 놓아둔다는 것이다. 그가 언급한 ‘예측할 수 없는 기법’은 우연의 개입과 맞닿아 있다. 영국의 대표적인 미술비평가인 마틴 게이퍼드(Martin Gayford, 1952∽ )는 켈리의 이러한 작업방식과 작품이 선적(禪的)인 성격을 담고 있음을 알았다. 이를테면 ‘우연히 작업이 이루어지게 놔두는 것’은 마음이 자연스레 흘러가는 대로의 방향인 것이다. 선(禪)이란 ‘마음을 한곳에 모아 고요히 침잠하며 생각하는 일’이며, ‘자신의 본성을 구명하여 깨달음의 묘경(妙境)을 터득’하는 것이다. 자연에 맡기듯 우연한 흐름의 방향이 곧 마음이 가는 곳이다. 모든 것의 근본은 마음이며 마음이 지향하는 바는 필연과 우연의 구분을 넘어 자유분방함의 경지 그 자체이다. 참선 수행하는 여러 선승(禪僧)들이 체험하고 들려주는바 그대로인 것이다. 이는 강구원의 작품이 추구하는 세계와 맥이 닿아 있다.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과 그 뒤에 숨어있는 본질과의 연결고리를 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현상과 본질, 우연과 필연, 확실성과 불확실성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영국의 저명한 신지학주의자인 애니 베전트(Annie Besant, 1847∼1933)는 “‘우연’이나 ‘우발’같은 것은 없다. 모든 사건은 그에 앞서는 원인, 그리고 이후에 발생하는 결과와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무지(無知)로 인해 과거와 미래를 모두 보지 못하기 때문에 사건은 허공에서 갑자기 튀어 나온 것처럼, 즉 우연인 것처럼 보일 때가 많다.” Annie Besant, The Ancient Wisdom, 1897. 애니 베전트, 『우리는 어디에서 와서 누구이고 어디로 가는가』, 황미영 역, 책읽는 귀족, 2016, 319쪽.
는 것이다. 작가 강구원이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우연의 지배’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어떤 힘이 우연처럼 작용하는 관계성과 필연적인 질서를 찾는 일이다. 그 안에 자연과 생명의 원리가 있는 것이며, 강구원의 작품세계가 지향하는 바이다.
Incidental Dominion in Life-Sonnet
Lee Jong-tae / Art columnist
I am overwhelmed with emotions to be writing this essay about Hwasaan Kang Goowon after a long time. It has been over 25 years since I’ve known him. Considering how time flies, I am grateful that our friendship has continued from the moment we first met and until now. When I look at his appearance, he reminds me of a pure and sincere monk.
I was first introduced to Hwasaan by Professor Seok-Woo Lee, who came to Oxford University in 1995 as a visiting professor. He passed away in 2017, but I have had a beautiful relationship with him for many years. Prof. Lee was a historian, painter, and art critic and devoted himself to writing books and creating his art works.
It makes me tear up to read Prof. Lee’s critique of Hwasaan’s work. The monsoon rain at night sometimes drag the whole world into a humid stillness. Imagining Hwassan’s face with a serious expression might not be irrelevant to that atmosphere. To the artists who live their life betting their tomorrows entirely on the canvas called art, the amplitude of bliss and frustration can only be that much broad. In regard to Hwasaan’s paintings, Prof. Lee Seok-woo stressed that they are “serious groping and attempts to reach the truth he desires.”
Hwasaan is one of the most intelligent and respectable painters I have met. He is taciturn, and when he does speak, he speaks softly like a scholar in the Joseon era. His speech and behavior are mature and prudent. In the early 1980s, he followed the same trajectory of Korean minjung art with figurative works. Then, entering the 1990s, he shifted to abstract works as he started to explore the theme of “accidental dominion.” As if unraveling a tangled up ball of yarn, he works on linear brush touches without being bound by a certain pattern while intensely observing and meditating the essence of thought. Thus, his paintings have space and cadence like concise poems,.
The theme of his first solo exhibition in 1989 was ‘Requiem.’ Requiem is a piece of music used in a Mass for the repose of the dead and is similar to our ssitgimgut, a shaman ritual for cleaning the soul of the dead. Realizing his lack of courage and limits of ability for socially engaged art that aims for social change, Hwasaan ended his figurative works by holding his first exhibition with the intent of offering a kind of ritual to console the spirit of those who sacrificed their lives for democratization.
In 2016, I was deeply immersed in the sonnets by William Shakespeare, a magician of words, as the whole world was commemorating the 400th anniversary of his death. As I was wondering who could convey Shakepeare’s beautiful words with paintings, Hwasaan sprang to my mind. I immediately talked about the sonnets with Hwasaan and proposed an exhibition.
Shakespeare’s sonnets are stories that portray love, lust, infidelity, and other conflicts surrounding a narrator, the poet, his noble and beautiful young friend, and a lady with dark eyes and hair. These elements that could have appeared trite due to the simple story line and standard poetic form are offset with “a thousand hearts.” These sonnets are all the more valuable because they not only demonstrate Shakespeare’s advanced command of linguistic
In the works presented in this exhibition, Hwasaan expanded the expressive method of drawing with a brush and used various techniques while using objects. Colors were excluded whenever possible mainly adopting monochrome. And yet, he attempted to reveal temporality from nature and the inspirations he feels from matter itself. Since life is born of absolute fortuity, its foundation overlaps with the fate theory of inevitability. He saw that dominion is freedom within the Absolute or means to act in accordance with the rules one has voluntarily established. Therefore, ‘Incidental dominion-sonnet’ was understood as a song of fateful life or a love song by necessity. Through his works, Hwasaan perceives all sorts of human emotions from the birth of life, the process of life, and from history and time, and he express the flow of the universe in a poetic way. The works presented in this exhibition, in particular, resemble the sonnets by Shakespeare, for Hwasaan portrays the colorful emotions of human beings in a fourteen-line poem that is most restrained to create his own sonnet.
While exchanging text messages with me, Hwasaan explained that his studio has turned into a cluttered factory but he is filled with continuous joy since the work process requires adequate labor and various techniques. He tried to convey in his works his desire to let the people hear about the birth and demise of life, the matters of life with a small song, which is the etymological meaning of sonnet. He said he prays his paintings are intensely seeped with religious quality so that they convey the eagerness of a weak human being to the audience.
Lastly, Hwasaan has maintained works that are immediate, emotional, and expressive. But his recent works have transformed to show very abstract and symbolic poetic words expressed in planned and geometric repetition. This implies that he has placed symbols such as life and life, love, and freedom under the providence of Mother Nature. I sincerely ho
작가가 우연의 지배와 포도나무를 연관 짓는 시도는 매우 각별하다. 작가는 몇 해 전 미국 캘리포니아 포도원 지역의 여행을 통해 포도밭 연작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지금도 작업 중인 국립 수목원 근처의 포도밭과도 연계하여 종교성을 포도나무의 선(線)속에서 표현하고자 한다. 역사적으로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포도나무는 ‘생명의 풀’이란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영적 특권을 상징하며,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대표적 식물이 되었다. 중요한 건물의 모자이크 바닥 장식이나 회당의 정문, 묘비석 등에 새겨져 있으며, 성경의 많은 비유나 은유적 표현들은 포도나무나 포도 열매 혹은 포도주 등과 관련되어 있기도 하다. 포도나무의 덩굴이 얼기설기 뻗어나간 모습에서 작가는 선(線)의 의미를 묻는다. 선(線)은 생명이 펼치는 방향성과 에너지를 나타내며, 포도라는 열매에서 희망과 기다림, 그리고 성취감을 본다. 또한 ‘마음으로 세우는 탑’은 영원히 쓰러지지 않는 불멸의 탑이며, 오늘의 우리에게도 절실한 시대의 화두이다. 참된 진리는 참된 마음에 있는 까닭이다. 작가가 승보사찰인 송광사 방문에서 그 의미를 새기며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불교에서 귀하게 여기는 세 가지 보물인 불보(佛寶)·법보(法寶)·승보(僧寶)가 있다. 불보는 중생들을 가르치고 인도하는 석가모니, 법보는 부처가 스스로 깨달은 진리를 중생을 위해 설명한 교법, 승보는 부처의 교법을 배우고 수행하는 제자 집단으로, 중생에게는 진리의 길을 함께 가는 벗이다.